<작은 아씨들>
‘로리’에 대한 캐해 혹은 리뷰, 어쩌면 비평


1.’캐해'(캐릭터 해석)에 대한 변론

어릴 적 읽은 번역문학의 몇몇 장면들은 거의 상상적 유년으로서, 실제로 체험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애틋함과 향수로 남아 있다. 예컨대 어릴 적의 나는 아파트에서밖에 살아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그리라는 과제가 학교를 비롯한 교육 기관에서 주어지면 늘 지붕과 굴뚝, 다락방이 있는 커다란 저택을 그렸다. 그 저택에는 늘 정원과 큰 나무가 함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 안에서는 집의 외관을 볼 수 없었으므로(보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나는 방에 틀어박혀 번역문학들을 읽으면서 집의 외관을 자연스레, 제멋대로, 내가 읽고 있는 책에 등장하는 집의 모습으로 상상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불가능해진 그때의 몰입력과 상상력은 아파트의 견고한 시멘트 벽을 거뜬히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해석과 판단 사이의 경계, 그리고 등장인물들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나의 경계마저도 흐려 놓았다. 『작은 아씨들』은 그 시기의 내가 닳도록 읽으며 생생하게 체험했던 작품들 중 하나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이야기를 이야기로 받아들이거나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작은 아씨들』은 구조와 의미를 갖춘 사건들의 배열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세계였다. 거리두기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내가 작품에 대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작품에 대한 어떤 판단이나 분석이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한 ‘순수한’ 호오였으며 때로는 적극적인 오해였다. 등장인물을 적극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두 인물 사이의 관계를 제멋대로, 과하게 해석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까지가 모두 내가 받아들인 책의 내용이랄 것을 이루었다. 인물 A와 B가 로맨틱한 관계에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상상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 상상은 망상에 불과할 것일지언정 강한 힘을 발휘하며 서사를 이해하는 과정에 침투했다.

이후 청소년기의 나는 오타쿠 비슷한 것으로 자라났다.(오타쿠를 비하하거나 오타쿠임을 자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타쿠를 각종 문화 컨텐츠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역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문화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칭하기에 스스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앞선 워딩을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2차 창작물들에 열광했는데, 사실 그 2차 창작물들이라는 것은 지면에 주어진 협소한 정보들을 활용하여 지면에 주어진 것 이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확대해석과 오해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창작이란 늘 1차 창작물에 기반을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자 1차 창작물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놀랍게도 저마다의 ‘뇌피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그 논쟁은 ‘적폐 해석’이라는 말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단지 창작물로서의 그것에 대한 논쟁이기 이전에 작품에 대한 비평적 행위이기도 하다. 또한 2차 창작을 위해서는 1차 창작물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 선행되어야 하고 2차 창작 자체가 1차 창작물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2차 창작을 비롯한 2차 창작물과 깊은 친연성을 가진 일명 ‘주접’ 글들이 비평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리뷰와 비평 사이에만도 구분이 요구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와중에 오타쿠들의 140자 글쓰기(트위터)는 비평에 요구되는 밀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덕후들이 어떤 비평가보다도 특정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긴 감상 시간과 깊은 몰입,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서론이 긴 이유는 다소 감정이 격하게 들어간 본인의 ‘캐해’성 리뷰를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재미있게도 덕후들의 해석은 그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대개 ‘캐해’와 ‘관계성’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가끔 나의 비평적 행위의 대부분을 구성하곤 하는 깊은 몰입, 거리두기의 실패, 뭔가 재밌는 것이 창조/창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그것이 주는 강렬한 즐거움과 ‘계속/다시 읽게 함’에의 추동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지면 바깥으로 검열되어야만 하는가를 스스로 묻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의문 속에서, ‘오타쿠는 정치적인 것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라는 정설에 가까운 가설과, ‘취향/쾌락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일 수 있다’는 문장을 동시에 되새겨 본다.

2. 로리의 경우

로렌스 집안 남자들의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서사’ 붐이 불면서 등장인물의 성별(이 여성이어야 한다는 것), 성 정체성(이 이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임이 과하게 드러나면 곤란하다는 것)이 작품의 정치성을 판가름하는 척도로 급부상한 바 있다. 실제로 ‘여성서사 등급표’라는 것이 위와 같은 기준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sns상에서 크게 유행하며 그러한 경향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자에 의한,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으로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고평가받는 『작은 아씨들』의 남성 인물들에 주목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 조금은 조심스럽다(많이는 아님).

그러나 나에게 자신에게 부여된 성별 규범을 묘하게 이탈하는 로리와 그러한 로리가 마찬가지로 성별 규범을 그닥 성실하게 지키지 않는 조가 맺는 관계성이 가장 큰 흥미로 다가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한 이는 분명 내가 퀴어한 인물에 큰 매력을 느끼는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이전에 퀴어-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리는 돈도 많고 키도 크고 정상성을 요모조모 빠짐없이 갖고 있는, 무엇보다 이성애자 남성인데 대체 어디가 퀴어하게 느껴졌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어울릴 수 있는 또래 소년들을 두고 굳이 옆집 여자애들이랑 논다는 것이 마냥 평범한 소년의 발달과업인 것 같지도 않다.

로리가 ‘작은 아씨들’이 즐겨 하는 ‘연극 놀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여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도 나에게는 정말 재미있게 느껴졌다. 여자/아이로서 살아갈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는 소녀들은 연극 안에서만큼은 남자도, 어른도 될 수 있으며 남자와 어른만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왕자나 기사도 될 수 있다. 이렇게 젠더가 연극을 통해서 끊임없이 수행되고 교란되는 그러한 여자 공동체에 로리가 던져진 것이다. 심지어는 계속 그 공동체에 머물고 싶어서 가난한 옆집 여자애들에게 간청을 하는 것이다. 이 특이한 취향을 가진 소년에 과몰입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리가 여자 공동체에 정식으로 ‘입회’하는 장면은 정말 재미있는데, 그 장면을 좀 같이 보고 싶다. 입회식 역시도 ‘연극 놀이’의 형식을 통해 진행된다는 것에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남자는 입회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장난치거나 뛰어다닐 뿐입니다. 이것은 여자들의 그룹입니다. 우리만으로 품위 있는 것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로리가 우리의 신문을 웃음거리로 생각하고 나중에 우리를 놀리는 구실이 될지도 모릅니다.”

“회장, 나는 신사(인용자 : 조를 부르는 것이다.)로서 맹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리는 그런 짓을 할 인물이 아닙니다. 로리는 글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 신문의 기사에 색다른 맛을 줄 것이며 감상적으로 되기 쉬운 것을 억제해 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 사람이게 해주는 것은 적은데 그 사람은 아주 여러 가지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그룹에 입회시켜야 하며 그 사람이 들어오겠다면 기꺼이 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대사들은 여성됨과 남성됨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과 그 교란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즐겁지만 이 공동체 내에서 로리의 위치를 알게/상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로리는 ‘입회식’을 필요로 하는 외부인이자 주변인이며, 여자 공동체의 소녀들은 이 소년의 미래를 좌우할 결정권을 지니고 있다. 입회식 장면에서 로리에게는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는다. 로리는 그저 잔뜩 긴장한 채로 입을 꾹 다문 채, 옆집 소녀들이 자기를 ‘연극 놀이’와 각종 ‘여자 놀이’에 끼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잘 알려져 있는 줄거리대로 로리는 나중에 조에게 청혼을 한다. 여러 가지 서사의 관례에 따라 생각하자면 사이좋게 지내던 소년 소녀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이 싹트는 전개야말로 당연한 것일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이 전개가 조의 거절을 통해서 캐해의 일관성과 전개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기상천외한 것으로 다가왔다. 왜냐면 로리는 남자이기 이전에 ‘여자 공동체’의 주변인-일원이기 때문이다. ‘주변인’이라는 것과 ‘일원’이라는 것은 둘 다 앞선 문장에서 밝힌 나의 의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우선 로리가 ‘주변인’이라는 것(인 것이야 말로 재미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로리가 조와 결혼을 하면 로리는 아주 제도적이고 확고한 방식으로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며 여자 공동체와도 법적인 관계로 끈끈하게 묶여 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로리는 더 이상 여자 공동체의 일원도 그 주변인도 아니게 된다. 그는 여자 공동체의 ‘여자 아닌 (이상한/애매한) 자’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확고한 남성이 되며 주변인이 아니라 오히려 중심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이는 그의 캐릭터와 그의 캐릭터가 다른 인물들과 갖는 관계성의 미덕에 대한 나의 해석에 큰 충격을 주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나에게 재미있는 전개로 여겨졌던 것은 조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후 크게 상심하여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로리의 모습이었다. 그때의 로리는 기존의 그가 가지고 있던 양성적인 속성을 모조리 잃고 남자됨의 나쁜 측면들만을 답습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야말로 나에게는 그가 자신의 남성됨(여성되기에 완전 실패해버림)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 일종의 위악처럼 보였고 나는 그 캐릭터를 더 깊이 연민하고 그리하여 사랑하게 되었다.

별로 중심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최애’로 꼽고 그 인물이 가장 ‘한남’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장면들에서 가장 큰 이야기의 즐거움을 ‘착즙’하는 이러한 해석이 단순한 덕후의 것을 넘어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퀴어 여성이 시헤남 캐릭터를 깊이 이해한 끝에 애정하게 하는 이러한 해석이, 아니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전에, 서사의 전체적인 흐름보다 애정이 가는 특정 인물을 몹시 파고 들어가는 ‘캐해’는 비평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아직 과몰입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로, 질문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