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 은모든

안락, 은모든

죽음 앞에 선 여성들

법적으로 안락사가 가능해진 미래에, 나와 가까운 이가 자발적 죽음을 선언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그의 선택을 오롯이 존중할 수 있을까. 소설 『안락』은 국민 투표에 의해 안락사 법안이 통과된 2028년을 배경으로 팔십대의 노인 이금래가 자신의 수명 계획을 발표한 후 죽음을 정리하는 과정과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변화를 겪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에서는 이금래의 죽음보다 서술자인 지혜의 삶을 더 비중 있게 다루지만, 자신이 죽을 날을 지정해 담담하고 철저하게 삶의 끝을 준비하는 여성과 그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할머니의 유럽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분의 삶의 신조를 일러둘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이다. 나는 그 말을 할머니에게 배웠다. 자신의 의지를 담은 말을 씨앗으로 하여 싹을 틔우고 열매까지 보시는 분. 그게 우리 할머니였다.”  -16p

오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큰언니의 식모살이를 보고 자란 이금래는 자식에게 가난을 되물림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식당일에 몰두하여 딸 셋을 키웠다. 이후 팔십대가 돼서야 둘째 딸에게 밥집을 물려주고 ‘밀린 세상 구경’을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혈당 수치가 높아지고 식단관리와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게 된 뒤에도 계획했던 10박 11일의 유럽 여행을 무사히 마친다. 계획한 것을 차근차근 이루며 살아왔던 이금래에게 남편의 예고 없는 죽음은 수명 계획을 세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앞으로 5년 후 미련 없이 떠날 것이라고 가족들에게 태연하게 말한 뒤 혼자 살면서 계획을 세우고 서류를 준비하며 화상 통화로 유언 공증을 진행해주는 법률 사무소 목록을 검토한다.

마지막을 차근히 준비하며 감정기복 없이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금래와 다르게 그의 막내딸은 수명 계획을 들은 직후 역정을 내며 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날이 많아졌고, 건강 검진에서 갑상선암이 발견되어 수술 후 회복을 하며 감정기복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 임종이 반년 앞으로 다가오자 창밖을 보며 멍하니 있거나 식구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하고 어느 날에는 욕실에 앉아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성격인 그는 가족들 중 가장 늦게 엄마의 결정에 체념하는 인물이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더구나 자식까지 있다면, 자기감정을 숨기거나 억누르고 사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놓치거나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엄마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견 없이 그의 계획을 돕는 둘째 딸과, 재혼 과정에서 생긴 오해로 서먹해져 엄마와의 대화가 거의 없는 큰 딸 사이에서 이러한 막내딸의 존재는 이금래가 자신의 죽음에 더욱 진지한 태도로 임하며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미련 없이 정리하도록 도와준다. 결국 큰 딸은 막내딸의 도움으로 임종 전 마지막 한 달 동안 엄마를 모시게 되고 모든 오해를 풀고 갈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보낸다. 

엄마와 딸이라는 다소 감정적일 수 있는 관계 사이에서 이금래의 손녀 지혜는 조금 떨어져 이들을 바라본다. 지혜는 할머니에게 언니가 배우고 싶어 하는 담금주 만드는 법을 배우거나 분갈이를 돕고, 옛날이야기를 듣는 등 그가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고 딸들에 대한 걱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준다. 나아지기 위해 약을 복용하는 게 아닌 나빠지지 않기 위해 엄청난 양의 약을 복용하는, 당뇨에 이어 파킨슨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고 지혜는 자신의 부주의함에 자책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종 전까지 더 자주 찾아뵙고 엄마의 감정과 할머니의 감정을 모두 어루만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한다. 전보다 가까워진 할머니와의 관계에서 그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마음으로 나를 더 돌보게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갈등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번거롭고 마음이 다치더라도 입 밖으로 꺼내야하는 이야기가 있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인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이에 맞선다. 자신과 주변에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균열을 제대로 메우지 않은 채 살아가던 여성들이 더 큰 균열인 한 사람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과정 속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아이러니는 다소 감상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이금래의 아름다운 죽음을 독자들이 오롯이 존중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누군가에겐 엄마로, 누군가에겐 할머니로, 또 누군가에겐 친구로 그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는 각기 다르겠지만 삶의 길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그는 소설의 인물들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해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