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를 소재로 한 콘텐츠를 언제 처음 접해봤을까를 생각해보니 무려 중학생 때 인소를 읽다 팬픽까지 읽게 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부감이 들면서도 묘하게 끝까지 읽게 되어 당시 유명했던 팬픽은 서너 편 정도 완독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리고 어쩌다 <친구 사이?>라는 작품도 보게 되었다. 그때는 게이 영화라고만 알고 봤기에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주연이 이제훈에 연우진이었고 감독은 김조광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분명 당시엔 재밌게 봤는데 기억에 남는 건 애정 신이 진했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왜 하냐 함은, 꽤나 예전부터 동성에 코드에 노출되었음에도 내가 아는 동성애는 게이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술로 포장된 게이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한국여자인 데다가 개방적인 서양문화에 대한 남모를 동경까지 한 데 합쳐져 게이 친구에 대한 로망까지 생겼었다. 이 정도로 동성애에 열린 사람이었는데 내가 동성애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 단순히 개방적인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인류의 80퍼센트 이상은 양성애자래 나도 그럴 거야 아마’라는 생각만 해왔다. 나도 양성애자일 것이라면서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동성애 콘텐츠는 볼 생각도 안 했다. 그렇게 남성애 중심 사회를 살았다. 

 큐큐퀴어단편선 세 번째 작품인 『언니밖에 없네』는 여성서사 그 자체로 채워진 책이다.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여성서사다. 이 책은 나에게 여성애를 알려준 나와 같은 여성주의자인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게이는 알았으면서 레즈는 몰랐던 나는 여성주의자가 되면서 레즈비어니즘에 눈을 떴다. 여성주의자라고 여성애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여성애도 여성주의의 하나라고 생각했기에 여성애와 함께하는 여성주의자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비로소 내가 어려서부터 친해지고 싶어 괜히 말을 걸고 짝꿍을 하지 못 하면 속상했던 그 마음들이 우정이 아니라 다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난 문과인데, 앞으로 과학은 할 일이 없는데, 굳이 굳이 과학 방과후를 들었던 건 단순히 그 애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는 걸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 책을 추천해준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것이었기에 친구를 믿고 책을 읽어보았고, 첫 번째 단편인 김지연 작가의 「사랑하는 일」을 다 읽을 때 쯤, ‘이 책을 사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지는 자기가 뭘 해주면 기분이 나아지겠냐며 계속 나를 달랬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발………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니야, 절대 사랑한다는 말만은 하지 마………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고, 아니야 해줘, 아니야 하지 마, 사이에서 그냥 눈물만 났다. 

-34p 김지연, 사랑하는 일

페페는 엘리제를 동굴이라고 표현했던 혜주의 말을 떠올렸다. 페페도 그 표현에 공감했었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혜주가 말하는 동굴은 언젠가 빠져나와야 할,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피난처를 표현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페페가 말하고 싶은 동굴은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숨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모여 있고 싶은 곳이었다. 

-136p 조우리, 엘리제를 위하여

수경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내심 품어본 적도 있지만, 주고받았던 사랑이라고는 수경과의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정희는 다른 사랑을 모른다. 그리고 한번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이 다른 사랑을 찾기 전에 그러하듯이 정희에게는 수경과의 사랑이 여전히 사랑이라는 세계의 전부를 의미했다. 그래서 정희는 자신을 벌이라도 주듯이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됐다.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안아주는 데에 인색한 사람이 됐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어서,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른 채, 입을 열어야 할 때. 가슴을 펼쳐 사람을 안아야 할 때, 진땀을 뺄 뿐이었다. 

-198p 천희란, 숨

 김조광수 감독은 진정성이 결여된 스토리와 과장된 게이 캐릭터들이 난무하는 보통의 퀴어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자신의 영화에서 만회해보고자 <친구사이?>를 만들었다고 했다. 멜로영화의 ‘순이’가 단지 ‘석이’로 바뀐다고 리얼한 퀴어멜로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게이들이 사랑하는 모습과 방식, 그리고 현실적 문제를 보다 사실적으로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고. 
내가 『언니밖에 없네』를 읽으면서 이 책은 사야해! 라고 생각한 건 내가 느꼈던 생각했던 바랐던 것들이 다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사이를 보고 나서 남은 건 애정 신밖에 없었지만 『언니밖에 없네』를 읽고 난 후에는 기억에서 지우고 있었던 사소한 신들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일까? 그렇다면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됐을 땐 어떤 기억이 떠오를지 기대될 정도라고 말을 고쳐보겠다. 여성서사로만 가득 채워진 이 가뭄 속 단비 같은 책을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분명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