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 죽음과 환상

<윤희에게> 죽음과 환상



이 글을 《윤희에게(2019)》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윤희의 나레이션 시퀀스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이 나레이션은 도착하지 못한 편지로 시작한 이 영화가 수신에 성공한 편지의 내용으로 갈무리될 수 있게 하며 관객들에게 진한 여운과 함께 갈등이나 사건이 성공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쥰과 헤어진 후 줄곧 자신의 생을 “여분의 삶”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퀴어였던 자신의 과거도, 여전히 퀴어인 자신의 현재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윤희가 퀴어로서 현재를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어쩐지 고무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내게 그 장면은 온통 흰 눈으로 덮인 오타루보다도 더 하얗게 표백된, 사후세계에 가 본 적 없는 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사후세계에 대한 진술처럼 아득한 것으로 다가왔다. 사건의 시간(등장인물)이 아니라 나레이션의 시간(해설자)을 따라 자신의 삶과 미래를 거침없이 정리해나가는 윤희의 낙관과 그 속도가 현실과 죽음의 사이를 어떻게든 매개해 보려는 환상의 조급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윤희의 나레이션이 사후세계로부터 들려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아니 어쩌면 윤희의 목소리는 죽음의 영역으로 이미 건너가 여기엔 없고 내가 느끼는 불길함은 죽은 자의 목소리 없음으로부터 느껴지는 기시감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 느낌은 나를 단숨에 《윤희에게》의 특정한 한 장면으로 돌아가게 했다. 바로 윤희가 오타루에 가기 위해 급식실을 그만두는 장면이다.

윤희는 급식실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재량에 따라 운용할 수 있는 휴가조차 제공되지 않는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그는, 급식실을 그만두지 않고는 오타루에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노동자 윤희의 자리는 다른 노동자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으며, 기업은 윤희가 오타루로 떠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아주 잠깐의 휴지조차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윤희는 급식실에서 일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고등교육 과정을 끝까지 이수하지 않은 윤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폭이란 그리 크지 않다. 또한 자녀의 생계마저 그의 손에 달린 상황에서는 어떤 종류의 무모한 선택이라도 쉬운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나라에서 노동 없이도 스스로와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을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되랴. 오타루 여행이라는 큰 지출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 심지어 재취업 여부마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후의 수입을 모두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똑바로 마주하려는 용기 있는 선택이기 이전에 물리적 죽음마저도 가뿐히 초래할 사회경제적 죽음을 감수한 선택이었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오타루는 어쩌면 죽음 직전-주마등이 스쳐지나간다는 아주 짧은 순간이거나 죽음 이후에 펼쳐지리라 믿어지는 환상의 세계일 테다. 오타루를 눈부신 흰 빛으로 덮는 눈은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할머니의 대사에서 드러나듯 윤희와 쥰의 삶이 “여분의 삶”이상의 것, 즉 이미 끝난 것 같아 보일지라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변화하는 것임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은 영화의 주인공을 삶의 조건들이 이미 정해졌다고 흔히 여겨지는 중년 여성으로 내세우면서 더욱 입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동시에, 흰빛의 눈으로 두터이 덮인 아름다운 오타루는 도시 외부와는 확연히 다른 기후적 특징(눈)을 지니며 죽음이 선택된 공간인 한국의 숨막히는 조건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국)이기도 하다. 늘 같은 옷차림에 어두운 표정, 머리를 질끈 묶고 가사노동과 경제노동 사이를 반복해서 오가던 윤희는 오타루에 와서야 화려한 귀걸이에 코트를 입은 채 그럴듯한 바에서 지난 사랑에 대한 회상을 술 한잔에 곁들일 수 있는 여유를 승인받는다.

이러한 ‘할 수 있음’이 한국에서 그가 감수한 것―내가 ‘죽음’이라고 부르는―을 전제하고 있느니만큼, 또 오타루의 공간적 특성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만큼, 한국으로 돌아간 윤희는 오타루에서처럼은 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생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을 직선적으로 끌고 가는 나레이션의 전능한 음성은 윤희가 한국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음을 힘주어 ‘주장’한다. 식당을 차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윤희의 대사와, 딸 새봄을 대학에 보내고 말 거라는 선언은 너무나 기적 같아서 허무맹랑하게까지 느껴졌다. 투명하고 너른 카페 창가에 앉아 이력서의 학력 란에 ‘고졸’을 당당하게 채워 넣는 윤희의 모습, 또 다름아닌 바로 그 윤희가 “나는 새봄이를 더 배울 게 없을 때까지, 스스로 그만 배우겠다고 할 때까지 배우게 할 작정이야”며 으레 한국의 어머니들에게 기대되는 바와 같이 자식 교육에의 열망을 드러내는 모습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그때, 때마침 새봄과 새봄의 학교 친구들이 유리창 너머의 윤희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간다. 그러니까… 그곳 그 자리에서, 그런 선언을 하면서, 자신의 학력을 부러 당당하게 써 내려가는 윤희라니.

이러한 맥락 속에서 쥰의 미래가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윤희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무척 눈여겨 볼 만하다. 쥰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는 수의사로 등장한다. 그 또한 윤희와의 재회 이전에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여분의 것’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중반부에는 쥰에게 관심을 보이는 젊은 여성 료코가 등장하는데, 우리는 료코의 대사들과 그에 대한 쥰의 반응으로부터 그 관심이랄 것이 다소 동성애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료코는 ‘쥰이랑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와 같은 인간적인 호감뿐만 아니라 ‘저와 쥰은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 ‘왜 연애 안 하시느냐’와 같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에 쥰은, “저 여태까지 저희 엄마가 한국인인 걸 숨기고 살았어요. 이로울 게 없으니까. 간단히 말하면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거예요. 혹시 료코씨도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라고 대답하는데, 여기서 ‘숨기고 살아야 할 것’이란 료코의 레즈비언 정체성일 터이며, 이 대사는 잔인하고도 완곡하게 료코의 호감에 대한 거절을 표하고 있다. 그때까지의 그에게 동성애(혹은 동성애적인 애정)이란 과거의 상처를 상기시키는 것이자 현실에서는 도무지 긍정적으로 성취해낼 수 없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희와의 재회 이후의 그가 분명 달라졌을 것임을 예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기서 발휘되는 것이 바로 쥰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쥰의 미래에 대한 상상은 영화가 복선처럼 던져 두었던 료코의 존재를 환기시키며 그의 미래를 퀴어로서의 삶과 연관짓는다.

오타루에서의 재회 혹은 한국으로부터의 탈출을 통해 윤희에게 가능해진 것(혹은, 그가 죽음이라는 무모한 선택지를 골랐다는 이유로 강제된 것)은 사회경제적 생존과 새봄의 교육에 대한 상상이다. 반면 눈이 내리듯 계속되는 삶의 면면들 속에서 쥰은 퀴어로서의 삶을 드디어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같은 상처를 통과한 두 퀴어 여성의 퀴어한 만남이, 이토록 다른 미래를 보여준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할머니의 대사는, 앞서 언급했듯 계속되는 삶에 대한 비유이다. 여름이 오면 비가 내리고, 겨울이 찾아와 눈이 내리는 그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은 늙어간다(늙어갈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 틈에서도 생은 변화할 수 있다. 또,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이후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는 이 대사를 반복한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강제된 트라우마틱한 이별 이후 그 상처의 시간에 멈춰 있던 두 퀴어 여성의 시간이 그 반복 위에서 비로소 흘러가게 한다.

그러나 삶과 시간의 주변부에서, 본인의 생을 ‘여분의 삶’으로―즉 애매하게 삶이거나 삶이 아니며, 현실이거나 현실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만 하는 곳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삶에 시간이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오는 미래를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책임질 수 있을까? 이곳이 과연 그런 세계인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유령도 아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윤희가, 윤희의 목소리가 도착할 수 있는 세계인가? 나는 서사의 시간이 중단되고 돌연 나레이션의 시간이 시작된 그 절단면에서 일종의 절벽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목격한 풍경은 높은 곳에서 한눈에 조감되는 미래라기보다 절망의 기운이 감도는 휑한 공터였다.

나는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닌 이 세계를 살아갈 만한 곳으로 묘사했음에 대해 《윤희에게》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절벽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다. 절벽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그저 멍청히 서 있는 것이라고도, 그렇다고 그 아득한 아래로 몸을 내던지는 것이라고도 하기가 어렵다. 절벽은 그저 절벽인 채로 우리에게 어떤 답도 제공해주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러니 환상의 세계로 거침없이 비약해 사라진, 윤희가 없는 이야기의 절벽-상상의 절벽에서, 윤희 대신 서서, 계속해 물을 따름이다.

이곳이 과연 그런 세계인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유령도 아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윤희가, 윤희의 목소리가 도착할 수 있는 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