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세상이 웃기다. 당연한 일은 떳떳하게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 묵살되고, 그 현장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일어난다. 보란 듯이 서 있는 성범죄 가해자와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연대의 현장. 가리지도 않는 떳떳한 그들의 어깨동무. 아,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구나. 어떤 일상도 잃어버리지 않았구나. 내가 사는 세상이, 제야와 제니가 사는 세상은 그렇구나. 왜 어째서.

최진영 작가의 소설 『이제야 언니』는 ‘제야’가 사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건 그의 동생 제니가 사는 세상이고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편협함과 잔인함으로 똘똘 뭉쳐 쉽사리 일상을 쥐고 흔드는, 새로울 것 없는 이곳의 모습이다. 소설에서 제야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찢어버리고 싶은 그 날로 되돌아간다. 제야는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 그 시간을 산다. 2008년 7월 14일. 제야는 15일도, 16일도, 17일도 살았지만 다시는 14일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

제야는 모든 게 무너진 그 날에 드러나는 얼굴들을 보게 된다. 그런 일을 당한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동네 어른들의 얼굴.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피해자같지 않다며 제야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던 경찰의 얼굴. 가해자이면서 자신이 희생자인 마냥 떵떵거리며 말하는 당숙의 얼굴. 왜 그런 곳에 가서 아무도 안 믿을 미친 짓을 당하냐고, 너만 망하게 될 거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눈물을 쏟는 엄마의 얼굴. 그런 어른들의 얼굴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얼굴을 본다. 세상은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는가. (p.133)

어째서, 그 단어는 머릿속에서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어째서 세상의 문법은 이렇게 틀려먹었을까. 강간이 왜 강간이 아니고, 제야의 말은 왜 거짓이며, 가해자는 무너지지 않은 채 살아가는가. 술 때문이다, 단순한 ‘여자 문제’다, 남자가 큰 일 하다보면 그럴 수 있다, 젊고 유명한 사람이 친척인 어린 애한테 그럴 이유가 없다. 어린 여자애가 잘해주니까 착각한 거다, 혹여 정말 그런 일을 당했어도 여자 애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제야는, 제야는, 여자애는…. 온갖 말이 들러붙는다. 오직, 제야만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제야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고, 설명하고 또 증명하라 한다. 왜 소리치지 않았냐고, 왜 도망치지 않았냐고,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또 묻는다. 근데 그걸 왜 이제 와서 얘기하느냐고.

7월 14일은 모든 곳에서 제야를 몰아낸다. 제야가 마땅히 누려야 할 공간들을 무너뜨린다. 빼앗는다. 길을 빼앗고, 집 밖을 빼앗고, 이곳저곳에 두려움을 심어 살아가야 할 동선이 빼앗는다. 일상을 빼앗는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대화를 빼앗는다. 그렇게 제야는 공간과 시간을 잃는다. 다정하고 무서우며, 친절하고 비열한. 괴물도 악인도 아닌 사람 때문에. 친절한 어른 남자 때문에.

나를 걱정했던 그와 강간했던 그는 한 사람이다. (p.216)

이 세상을 사는 제야는 제니를 걱정하고, 은비를 떠올리고, 이모를 생각한다. 그리고 미로를 걸으면서 마주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론 벽을 짚으며 출구를 향해 걷는다. 그게 제야의 뒷모습이다. 제야는 걸으며, 늘 당숙을 생각하고 당숙이 자신에게 한 짓을 생각한다. 마침표 없이 돌고 도는 그 날을 비밀로 두지 않고, 끝까지 살아낼 거라고. 그런 일이 있던 나로, 온전한 나로, 눈치 보지 않고 제야는 제대로 살아내고 싶다 말한다. 그렇게 미로에 손을 대고 걸어가는 제야에게 우린 행복을 말하는 대신, 시작을 말한다. 100을 말하는 대신 0을 말한다. 불행에서 손을 잡은 우리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린 0이 되어서 더 멀리까지 가는 제야와 함께 간다. 나만 겪은 일이 아니고, 그건 너만의 일이 아니고, 이게 끝이 아니라는 예감과 두려움 속에서. 우린 그 불행에서 손을 잡았다.

제니야, 나는 아프지 않으려고. 다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살 거야. 그 사람보다 오래 살아야 하니까. 그보다 훨씬 건강하고 멀쩡하게 살면서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죄를 확인시킬 거니까. 언젠가 그가 한없이 초라하고 나약해지면 갚아줄 거니까.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