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시선


윤이형, 「승혜와 미오」 (『작은마음동호회』)

윤이형의 (지금으로서는, 아마 마지막) 단편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2019)는 단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교차성 페미니즘에의 통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쓰여진 소설들의 모음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에서는 성별뿐만 아니라 연령, 젠더, 동물권, 그리고 채식주의를 비롯한 개인의 신념들까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학에 큰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드러나 있다.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만도 ‘과하게 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문학성을 포기한 행위’로 간주되는 와중에 이런 주제들을 문학 내부로 과감하게 들여온 작가의 태도가 무척 반갑고, 용감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그 여러 가지 범주들을 교차하고 사유하는 작가의 태도가 지닌 피상성과 피상적 감상성에 답답하리만치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주변에서 이 소설집을 읽고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작은마음동호회』가 출간된 작년 8월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내가 혹시 (비건/퀴어/페미니스트/20대 여성으로서)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이 불편함과 문제의식을 설명할 만한 문학 이론이나 ‘전문 평론가’들의 글을 각주로 달아야 하는 건 아닐까, 페미니즘 문학의 문학성이 의심받고 있는 이 시점에 윤이형의 소설들을 못마땅해 하는 나의 의견은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고민들을 계속 궁굴려 왔다.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는 못했으나, 어쩌면 그렇기에 이 글을 쓰고 공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읽고 함께 고민해 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승혜와 미오」는 레즈비언 여성에 대한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팽배한) 사회적 통념을 넘어, 그들을 입체적인 인물로 구성하려 한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성애) 정상가족 제도와는 별 관련이 없으리라 여겨지는 레즈비언 여성 승혜는 부부와 아이로 구성된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고, 얼핏 정상가족 제도에 봉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베이비시터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다. 반면 그의 연인 미오는 가족 제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흔히 이성애-연인들이 결혼 여부나 시기를 가지고 크게 싸우듯) 둘 사이의 갈등을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심지어 미오는 비건이다. 승혜는 비건이 아닌데 말이다! (소설은 전자의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미오가 비건이라는 사실―그쪽이 훨씬 ‘비정상’적인 쪽인 것이다.) 하나의 ‘범주’로서 퉁쳐진 채 다뤄지던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퀴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드러내고, 뿐만 아니라 퀴어 여성 내부의 다양한 차이 또한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은 이 소설의 분명한, 훌륭한 성취이다.

하지만 그게 다다.
여성들 간에도 차이가 있다. 레즈비언 여성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그게 다다. 그것만을 말하고서 이 소설은 그에 대해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차라리 레즈비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와 같은 기만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레즈비언을 이상화하고 유토피아 취급해 왔던 일부 페미니스트 여성들에게 이 소설이 발견(이게 발견인가? 여성 퀴어가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갈등하는 개인들의 집합이라는 것은 숨막히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살아내며, 겪어내며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게 발견이라면, 이게 발견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또 분노하게 한다.)한 것은 충격적이고 놀랍게 여겨졌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이 소설의 발견이라는 게 레즈비언 여성들 간의 차이가 바깥의 시선-제3자의 시선을 통해 인식적으로 종합되고 흡수되고, 그 결과 그 제3자의 목소리로 공표된 것의 헛헛함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차이를 가진 레즈비언 여성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레즈비언 여성들 간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큰 차이를 가지는 게 분명한)이성애-연인들이 사회와 제도의 튼튼한 뒷받침을 통해 비틀대면서도 잘 살아가는 동안 작은 차이조차도 자신들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균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 여성 성소수자가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 그저 획기적인 발견처럼, 혹은 레즈비언들의 ‘치부’처럼 차이를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물론 모든 질문에 소설이 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사유하지 않는다. 피상적인 자기검열, 잘못을 고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반복될 뿐인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읊조림을 반복할 뿐이다. 앞서 쓰였던 ‘이 질문에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수정한다. 이 질문은 승혜가 베이비시팅을 하고 있는 가정의 구성원이자 승혜의 고용주인 이호 어머니의 목소리로 답해짐으로써 거의 봉합되어 버리고 만다. 그 봉합의 장면을 언급하기 이전에 소설이 ‘채식주의’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사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오는 왜 그렇게 고기를 못 견디게 싫어하게 되었을까, 승혜는 문득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게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다. 미오는 얼굴이 까만 대로, 너무나 좋아해서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다니는 대로, 운동을 싫어하면 싫어하는 대로, 그냥 그대로 미오였고, 승혜는 또 그대로 승혜였는데, 점점 서로의 ‘그대로’가 못마땅해지는 일이 늘어가고 있었다.”

채식주의는 이 소설에서 ‘그대로’라는 단어를 통해 얼굴이 까만 것이나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는 옷 취향, 운동을 싫어하는 성향과 같은 취향의 문제와 퉁쳐지고 있다. ‘교차’가 아니라 오로지 ‘다양성’만이 남은 교차성 페미니즘(비슷한 것)이 다양성을 어떤 방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난 전형적인 사례라고 본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성소수자나 채식주의자를 페미니스트의 단지 부분집합으로 간주하며, 나는 레즈비언이니 레즈비언인 대로 잘 살면 되고 너는 이성애자니 이성애자인 대로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공존과 존중의 탈을 쓴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론가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퀴어/교차성 페미니스트도 정체성의 문제를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 함께 달성되는 쉬운 과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교차성 페미니즘이 이제껏 계속 분투하고 씨름해온 것은 그저 취향의 문제, 심지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까지 여겨지는 그 ‘개인적’ 기질의 문제를 상징질서의 차원과 정치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제로 삼기 위함이었다. 교차성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성애자 페미니스트’혹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정체화하고서 그 정체성이 존중받기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요구가 더 큰 사회를, 더 큰 부정의를 향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이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것이 되길 바라는 것은 나태한 기대이다. 스스로 정의한 그 정체성에 계속 도전하고 그 정체성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덧붙이자면, 누군가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가 그 사람이 정치적인 존재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로 간주되는 것 또한 하나의 결정론적인 사유이며 대상화다. 게다가 레즈비언 또한 ‘단지 레즈비언으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는 것으로부터 면제되어선 안 된다. 이 ‘면제되어선 안 됨’ 또한 그들이 누려야 할 이득이 아니라 권리이다.)

한편, 소설 속에서 ‘밀푀유 나베’는 경계의 존재인 레즈비언 승혜가 정상성 혹은 정상성과의 화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경을 드러내는 소재로 드러나는데, 소설의 말미에서는 실제로 이 ‘밀푀유 나베’를 매개로 하여 정상가족-이호와 이호의 엄마와 비정상-레즈비언 승혜는 교감이랄 것을 성취하는 장면이 제시되기도 한다. 밀푀유 나베는 승혜에게 “빨간 고기와 하얀 배추가 겹겹이 쌓여 냄비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음식이자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어떤 아득한 세계의 상징, 영원한 불가능의 표식”이다. 밀푀유 나베는 채식과 육식의 절충안이 아니라 명백하게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만 먹을 수 있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고기와 야채가 “겹겹이 쌓여” 함께 요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불가능한) 화합의 상징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도 앞서 언급했던 다양성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가 엿보인다. 그것을 ‘그저 종합’하기만 한 것의 결과 채식인은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그저 종합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다양성과 화합을 판단한다.

심지어 앞서 언급했던 화합의 불가능성이란 육식을 ‘하는’ 승혜가 아니라 육식을 ‘하지 않는’ 미오의 탓으로 돌려지는 것 같다. 채식인과 비채식인의 갈등을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늘 절규하는 자, 울부짖는 자, 항의하는 자로 그려지는 것은 미오이며, 그 절규와 울부짖음을 눈앞에 두고도 승혜가 응시하는 것은 그것이 야기하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밀푀유 나베가 상징하는 아득한 세계, 정상성과의 화합이다.

이 소설에서 화합이 언제나 비정상성과의 화합이 아니라 정상성과의 화합으로 제시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승혜가 결국 밀푀유 나베를 나눠 먹는 것은 ‘정상 세계’의 구성원인 이호의 엄마와 이호다. 애초에 밀푀유 나베를 먹고 싶어 하지 않는 자(여기서 잠시 멈춰서, 비건은 먹지 못하는 자인가? 아니, 먹기를 원하지 않는 자이다.)인 미오는 정상과 비정상이 아름답게 화합하고 있는 듯한 아득하고 아련한 장면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미오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인 여성 연인과 유리된 승혜가 눈치를 보며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이호의 순수함과 정상가족의 핵심 구성원인 이호 어머니의 너그러움을 매개로 하여 비로소, 화합은 이루어진다.

“―이호야, 엄마는 매일 회사에서 늦게 오지?

―응.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엄마는 좋은 엄마야, 나쁜 엄마야?

나쁜 …… 중얼거리던 아이가 혼란에 빠져 말을 멈추더니, 조금 후 다시 말했다. 음, 모르겠어. 엄마는 그냥 원래 그렇잖아.

― 그래, 원래 그렇지.

― 응.

― 엄마도 모르겠어, 엄마가 좋은 엄만지 나쁜 엄만지. 엄마는 그냥 엄마지. 회사에서 늦게 오지만 그래도 엄마지. 마찬가지야. 세상에는 다른 누나랑 사랑해서 같이 사는 누나도 있는 거야. 그냥 원래 그런 거야. 그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 모르겠어.

― 그래, 엄마도 모르겠어.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아마 그건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야. 알았지?

― 응.”

그리고 이것이 내가 앞서 언급했던 그, 결말부의 ‘봉합’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이런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이호가 나중에 헤테로 남성 페미니스트가 되어 누군가의 성소수자 혐오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극한 상황 가정)…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흔한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발화에서 보이는 속죄 의식과… 그로부터 말미암은 ‘남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속죄 뿐이니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말에 무조건 넵넵하자’적인, 페미니즘 안에서 ‘조신남’이라는 타이틀에 힘입어 너그럽게 용인되고 있는 사유의 태만함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각설하고, 정체성의 문제는 ‘좋은 게 좋은 거’고,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는 것’이 미덕인 곳에, 그러니까 치열한 사유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안전하게 존중받고 안전하되 피상적인 존엄성을 아주 소수의 너그러운 기득권에 의해서만 보장받는 곳에 격리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런 식의 미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것이 맥락을 따지지 않고 이 장면만을 발췌하여 파편적으로 독해한 결과라면 좋겠지만, 앞부분에서 내가 길게 설명했듯 ‘다양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소설 전반에 걸쳐 있는 것으로 이 장면 또한 소설 전반에 걸친 사유 방식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심지어는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 등지에서 ‘다양성’이나 ‘교차성’이라는 말이 손쉽게 사용되고 적극적으로 오인되는 맥락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다.)

「승혜와 미오」는 레즈비언 여성의 1인칭 시점을 통해 레즈비언 당사자의 삶을 묘사하고, 레즈비언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 차이라는 것이 사유되기도 이전에 고기와 채소가 나베그릇에 한 데 켜켜이 쌓여 고기로부터 온 것인지 채소로부터 온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뭉뚱그려진 맛의 국물을 우려내는 동안, 차이는 종합되고 조리되고 봉합된다. 정상성의 이름으로 화합하고 정상성의 이름으로 정리되고 공표된다. 화합이 가능해지는 것은 결국 1인칭의 밖, 제3자-기득권-의 자리에서이다. 나는 이 온정적 시선에 감사하기가 조금 힘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