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간극과 성장



중년의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는 어릴 적 ‘시그리드’역으로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리고 20년 후, 자신을 톱스타로 만들어 준 연극의 리메이크에 출연 제안을 받지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주인공 시드리드가 아닌 중년의 상사 ‘헬레나’역이다. 관객의 기억 속에 영원한 ‘시그리드’로 남고 싶은 마리아가 ‘헬레나’를 만나며 겪게 되는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리아는 어린 나이에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시그리드’ 역을 맡으며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시그리드’는 상사인 헬레나를 유혹하여 자신에게 빠져들게 만든 후 결국 헬레나를 자살에 이르게 하는 인턴 역이다. 시그리드는 파괴적이고 종잡을 수 없지만 동시에 자유를 내뿜는 매력적인 악을 보여준다. 당시 18살 무명의 배우였던 마리아에게 시그리드는 배역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0년의 시간이 흐른 후, 중년의 배우가 된 마리아는 「말로야 스네이크」 속편 연극의 헬레나 역을 제안 받는다. 극 중 헬레나는 마흔의 나이에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며 인생에서 더 이룰 것 없이 안정적인 삶을 살던 중, 시그리드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결국 파멸에 이른다. 마리아는 ‘헬레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거의 시그리드를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헬레나에 대한 부정과 두려움을 느끼며 감독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은 여전히 시그리드이고, 그렇게 자유를 느끼며 살아왔다고.

‘” 지금 내가 헬레나 나이대이긴 하지만, 그 역을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죠”

나는 여전히 시그리드예요

–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중 마리아 대사

마리아가 헬레나 역을 맡는다는 건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배우로서의 나이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헬레나를 연기하는 것이 자신의 삶 또한 뒤흔들 거라 직감했다. 그러나 그의 비서인 발렌틴을 비롯하여 마리아를 둘러싼 모든 이들은 이건 마리아에게 좋은 기회라고 말한다. 20년 전의 시그리드를 연기했던 마리아가 20년 후의 헬레나가 되어 결국 둘은 같은 인물이라는- 속편의 진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건 마리아뿐이라는 것이다.

마리아만이 헬레나를 해낼 수 있다는 말에 마리아의 자존심은 일렁였을 것이다. 시그리드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는 마음이 작동하는 한편, 젊음은 영원히 남아있지 않는다는 그의 좌절감과 성숙한 각성이 결국 헬레나로 이끈다. 부정의 연속 끝에 헬레나 역을 맡게 된 마리아는 과거의 시그리드를 내려놓고, 시간의 흐름대로 새로운 시그리드를 받아들였다.

어느덧 젊은 세대의 것을 두 발 뒤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서게 된 마리아는 헬레나를 통해 그 간극을 발견하고 부정하기를 반복한다. 헬레나의 나약함과 약한 점만 보던 마리아는 연기와 현실을 넘나들며 결국 헬레나를 자신의 모습대로 마주하게 된다. 이 치열한 과정은 젊음과 나이듦의 대결이 아니다. 그가 헬레나를 받아들인 건 그 두 개가 이기고 진 것의 결과가 아니다. 내부와 외부의 세계에서 간극을 마주한 마리아가 배우로서 하나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며, 젊음과 같이 흘러가는 것을 쥐고 있던 힘을 풀고 새로운 것으로 자신의 손을 채운 것이다.

슈퍼히어로 영화 캐릭터에도 진정성이 있다는 마리아의 비서 ‘발렌트’의 말에 한껏 비웃던 그는 이제 마냥 거부하거나 비웃음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대 시작 전 헬레나의 자리에 앉아 서서히 암전되는 조명 아래에서 담담히 준비한다. 명백한 중년 여성 배우의, 마리아의 성장 장면이다.

젊음은 힘이 있지만, 그만큼 빠르게 소진된다. 젊음이 흘러가는 것은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깨닫는 때가 온다. 그리고 그 순간은 환하게 빛나던 불이 갑자기 힘을 잃고 꺼져버리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대에서 마리아를 비추던 조명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여전히 그를 비출 뿐이다. 무대 밑에서 그의 성장을 관조한 우리는 그 다음 조명 아래 선 마리아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