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여자들 中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

사랑은 계속 춤을 추는 것

사랑이란 건 뭘까. 종종 순정만화 속 센티한 주인공이 할 법한 공상에 빠질 때가 있다. 박찬욱 감독과 아가씨를 공동 집필한 정서경 작가는 상대를 아기처럼 대하게 되는 것이라 표현했고 톨스토이는 사랑을 자기희생에 빗대어 말했다. 살아온 날이 길지 않아 아직 느껴보지 못한 감정인 탓인지 훗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류의 것인지조차 가늠되지 않는다. 겪어본 적 없는 절절함을 공감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 그러한 정의들을 맞닥뜨려도 고개를 가만 끄덕이는 일이 전부였다. 거창했다 언제나. 나에게 사랑이란.

여성간의 생활, 섹슈얼리티, 친밀성을 다룬 책 ‘피리 부는 여자들’, 그 중에서도 서한나 작가의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는 여성들 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한다. 한 문장에 ‘여성들 간의’와 ‘섹슈얼리티’라는 표현이 함께 들어가 있는 건 꽤나 어색한 일이다. 레즈비언은 물론 여성의 성적 욕망 표현 자체가 언제나 암묵적인 금기 취급을 당해왔으므로. 드물게 묘사되는 경우에도 남성들에 의해 대상화되는 일이 공연하기 때문에. 당연스럽게도 그러한 시선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 있는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에서는 작가가 경험한 세 번의 사랑 이야기가 솔직하고 자유롭게 또 거침없이 이어진다. 이야기 속 세 개의 사랑 서사는 판을 치는 이성애 서사들과 다를 바 없이 보편적이다. 그 애에게만 있는 것 같은 무언가에 본능적인 끌림을 느끼고, 수업 중에 핸드폰을 올려놓지 않는 사소함에 호감을 가지고, 무언가 바닥을 친 것 같아 헤어지고. 모순적이게도 이 글의 특별함은 그런 점에 존재한다. 사랑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된 여성의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연애 서사. 누군가에 의해 재단되지도 종속되지도 않은 채 순간마다 느꼈던 감정들을 가감 없이 표현한 글.

이름 붙이지 못한 관계는 어디까지 닿아도 되는지 모르는 관계가 되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비슷한 말을 찾아다녀도 이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p.65

난 니가 왜 이렇게 좋을까. 정체를 모르겠는데 속수무책 빠져든 건 네가 사념적인데 옷을 잘 입고 옷 잘 입는 사람답지 않게 잘 망가지고 망가지는 순간에도 어딘가 도도했기 때문이다. 아닌가. 절대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처음 둘이서만 보던 날 지하도를 걷다 윤이가 팔짱을 껴서, 그래서 좋았나. 잘 모르겠는데 좋은 것, 이건 정말로 좋은 거였다. -p.73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에서 묘사된 사랑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들. 특히 두 번째 문단은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허리 끊어지게 울고 나서도 좋아할 사람은 계속 생겼다. -p.89

제목과 가장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되는 구절이다. 비단 레즈비언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모든 여성들의 삶에 여성애적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거란 의미일 것이다.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일이. 사랑이란 그런 거 아닐까. 그렇다면 더 이상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책은 제목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피리를 분다. 철저히 여성들의 언어로. 언제부턴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나는 그 어렴풋하고도 강렬한 소리를 망설임 없이 따라갈 것이다. 아니, 따라가고 있다. 동굴 끝에 존재하는 빛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단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