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의 시선] 미성년

4인의 시선

달에 한 번 에디터 네 명이 같은 작품을 보고 서로 다른 네 개의 글을 씁니다. 독자와 주고받는 시선의 교환을 통해 더 넓게 작품을 봅니다.

9월의 작품은 김윤석 감독의 영화 <미성년 >입니다.

해당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성년>이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

▪빈다

대입 시험을 준비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남자는 정시에 강하다는 말이었다. 남자는 체력이 좋아 3학년 때 죽어라 공부를 하면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만 여자는 수험 생활이 길어질수록 진이 빠져 불리하다는 의미였다. 당장 생각나는 것이 저 말밖에 없지만 저런 말을 듣고 자라다보니 나에게도 여자 고등학생은 남자 고등학생에 비해 뒷심이 달리고 어딘가 미더운 구석이 부족한 이미지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

영화 <미성년>은 바람난 아빠로 인해 두 가정에 금이 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흐름상 불륜이 드러나는 분량이 1/4 정도 차지해도 그다지 루즈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는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불륜 사실이 밝혀진다. 메인 사건은 짧고 굵게 보여주고 남은 86분 동안은 그 사건을 해결하는 두 미성년을 조명하겠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두 명의 미성년자와 세 명의 성년이 나온다. 온전하고 화목한 가족을 두고 바람이 난 아빠 대원(김윤석)은 찌질함으로 가득 차 저게 어떻게 어른이냐 싶은 행동만 한다. 딸 앞에서는 강한 척 하지만 사실은 남편의 바람으로 삶이 송두리 째 흔들리는 영주(염정아)와 자신을 걱정하는 딸에게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살겠다고 눈물을 보이는 미희(김소진)도 ‘어른’스럽지는 않아 보인다. 영화의 나오는 모든 성년들은 불륜이라는 사건이 자신들과 직결되어 있음에도 맞서지 않고 피하기만 하는 非성년스러운 행동만 할 뿐이다. 반면에 두 미성년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는 자신의 가족이 처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사건을 알리고 해결하는 모든 과정에서 주리와 윤아는 언제나 선두에 서 어른들이 회피한 것들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끝을 낸다.

영화 <미성년>은 성년답지 않은 성년들과 미성년답지 않은 미성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두 명의 여성이다. 만약 주인공이 여자 고등학생이었어야 하는 것이 얼토당토 않는 모성애를 위한 연출이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주인공이 여성이기에만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주리와 윤아는 내가 알던 여자 고등학생과는 분명히 달랐다. 영화 <친구> 외 수많은 작품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의리의 상징이었던 남고생은 폭력에 얽혀도 포장되기 마련이지만 여자 고등학생은 예민하거나 마냥 해맑거나 사랑에 빠졌거나 혹은 성적 대상으로만 표현되며 그들이 잘한 것을 칭찬하기 보다는 실수를 책망하는 방향으로 연출되었다. 그래서 두 가족을 파탄내고도 염치없게 사랑하는 딸~을 외치는 남성을 코믹하게만 보여준 것이 –희화화한 것이겠지만– 찝찝하게 걸려있더라도 미성년을 괜찮은 영화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에 나타나는 여성 캐릭터가 내가 보아왔던 영화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입체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여전히 미성년인 채로

▪ 오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처럼 청소년 시기 때의 나는 어른이 하는 말을 별 의심 없이 믿었다.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다, 나중에 후회할 거다 등 어떤 ‘제재’ 형태의 말을 듣는 것이 익숙했다. 어른은 미성년의 잘잘못을 따져들기 좋은 위치에 있었고, 그 자리에 선 어른의 잘못은 잘 감춰져 드러나지 않았다. 사회에서 미성년은 성인보다 ‘미성숙한’ 나이대의 사람이며 이들이 내릴 수 있는 결정과 책임의 폭은 성인의 것보다 작다. 근데 그 책임이란 건, 어려서 없는 것도 아니고 나이 들어 많은 것도 아니더라. 그래서 가끔 성년과 미성년으로 정해진 배지를 달고 살아가는 게 우스꽝스러운 역할극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 <미성년>은 불륜이라는 명확한 소재를 통해 “–답게”라는 지점을 건드린 것 같다. 어른답게 혹은 아이답게 같은 표현처럼 나이에 맞게 붙어질 거라 기대되는 모습을 전복하고 또 되돌려놓는다. “너 이러면 나중에 큰일난다”는 말에 돌아서서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주리는 이미 성년의 허풍을 눈치 챈 사람이었고, 엄마의 병원비를 갚고 온 윤아는 주리에게 “네 엄마 잘 돌봐”라고 말하는, 곧 어른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영화의 끝에 삽입된 폐장된 놀이공원에서 맘껏 소리 지르며 뛰어노는 두 미성년의 모습은 결국에 보고 싶었던 청소년의 얼굴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왜 여전히 이들에게서 티 없는 웃음을 보았을 때 안심이 되는 지, 결국 어른이 내뱉은 행동의 부스러기가 이들의 앞에 떨어지지 않았으면 했던 마음의 존재가 불편하게 떠오른다. 미성년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항상 성년의 것보다는 가벼워야 한다는 고정적인 마음과 바람이 불쑥 들고 만다.

주리는 남동생의 존재로 새롭게 가족의 형태를 꿈꾸게 되었지만 하루 사이에 그 또한 무산되고, 일찌감치 가족이 해체된 윤아와 놀이공원에 앉아 사건의 감상을 내뱉듯 말한다. “너네 아빠도, 우리 엄마도 나이 들어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겠지”– 두 미성년은 그렇게 성년을 이해하는 몫까지 주워 담고는 사사로운 둘만의 시간을 즐긴다. 그들이 미성년이어서 또 걱정했던 오만한 눈을 보란 듯이 뒤로한 채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줌의 것을 나눠 덜어낸 우유를 각자 크게 삼켜내며 지금은 우리의 방식대로 잘 살 거라고 예고한다. 그렇게 달지도, 쓰지도 않은 맛을 삼켜낸 여전한 미성년의 나이로, 그들답게 말이다.

화를 내야할 대상을 분명히 하는 일

▪ 땡선

극 중 가장 성년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은 영주라고 느껴진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영주는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유독 타인 앞에서 흐트러짐 없이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다. 미희가 입원한 병원에 와있는 주리와 윤아에게 “둘이 싸우지 마. 너희가 왜 싸워?” 라고 말하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화를 내야할 대상, 이 일에 피해를 봐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영주가 이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아빠를 향한 주리의 배신감이나 대원에 대한 경멸로 인해 보여지는 윤아의 거친 행동을 직접적으로 멈추게 하지는 못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더불어 너희는 서로를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상처를 줄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자신에게 닥친 말도 안 되게 황당한 일에 대한 화를 엄한 곳에 표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영주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렇게 하지는 못 할 것이다.

영주가 이토록 다분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성격이기도 하겠지만, 딸 주리가 아직 17살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주변의 사소한 영향으로도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는 나이이다. 주리의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영주는 거짓말을 하고, 딸 앞에서는 큰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영주는 자신의 아픔을 나눌 곳 없이 혼자 있을 때 무너지는 게 익숙한 인물이다. 대원의 외도는 사실상 주리와 윤아에게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다. 이것을 이미 잘 알고 있고, 어른들의 행동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마친 후 자신이 취해야 하는 자세에 대한 답을 내린 듯 보이는–영화에서는 생략되어있지만– 영주는 그렇게 17살의 미성년 옆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그들을 배려한다.

가족이기에, 식구이기에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구성원 누구와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좋든 싫든, 같이 있든 떨어져 있든 우리는 가족의 굴레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주의 차분함과 그에 따르는 현명함은 대원의 무책임한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진정 화를 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 붕괴된 가족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고도 일상을 유지해야하는 딸에게는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하여 아이들의 미래를, 삶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영주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행동과는 상관없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상처받은 미성년들에게, 그들과 아주 가까운 가족(주변인)의 잘못 때문에 네 자신까지 잃어버리지는 말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다.

미성년과 미성숙의 차이

▪ 183

영화의 후반부, 시험을 치는 날 동생의 시신이 든 박스를 들고 학교를 빠져나가는 윤아와 주리는 “너네 나중에 그러다 큰일 나!” 하고 경고하는 선생을 향해 말한다. ‘거짓말.’ 그 말이 맞다. 거짓말이다. 시험을 한 번 보지 않는다고 둘의 인생에 엄청난 고난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겪어본 어른들은 심심찮게 증언하곤 한다. 학창 시절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으로 보였던 수능마저 인생에 비대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허나 ‘시험을 치르지 않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이벤트가 되어야 마땅할 나이인 17살 – 그 중심에 서있는 두 명의 주인공 윤아와 주리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세상에는 시험보다 더 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은 ‘미성년’과 ‘미성숙’이 완전히 다른 영역의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윤아와 주리뿐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그 증거가 된다. <미성년> 속 어른들, 즉 미희, 대원, 김선생, 박서방, 심지어는 윤아가 알바 하는 편의점을 찾은 불륜 커플까지 전부가 ‘어른답지 못한’ 모습들을 보인다. (미희와 대원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에 약간의 어폐가 있겠으나 가시적인 언행으로 보았을 때) 딸 앞에서 불륜 상대가 마지막 사랑이라며 엉엉 울고,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본인의 학생 앞에서 다른 학생의 뒷다마를 깐다. 반면 윤아와 주리는 어떠한가. 그들은 성년이 아니라는 이유로 손님에게 무시를 당하고 동생의 출생 신고도 직접 할 수 없으며 신용 카드를 만들 수도 현금 서비스에 가입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새 생명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는 것도, 영주에게 엄마의 입원비용을 갚는 것도,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자기 선에서 해결해보려 노력하는 것도 전부 미성년인 윤아와 주리다. 행동만 놓고 본다면 누가 성년이고 미성년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다.

성년이 된다는 것과 성숙해진다는 것은 다르다. 영화는 그 점을 정확히 곱씹을 뿐 아니라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전부 성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성년이 성숙하지 않다는 것이 잘못으로 작용하진 않겠으나, 아직은 덜 성숙해도 될 미성년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고로 나는 내가 어떤 성년으로 자라야 할지 거듭 고민하며, 영화 속 미성년들인 윤아와 주리, 영주와 미희의 행복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