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의 시선] 작은 아씨들

[4인의 시선] 작은 아씨들

4인의 시선


달에 한 번 에디터 네 명이 같은 작품을 보고 서로 다른 네 개의 글을 씁니다. 독자와 주고받는 시선의 교환을 통해 더 넓게 작품을 봅니다.

8월의 작품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

▪ 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조는 글과 책을 사랑한다. 자신의 길은 제 힘으로 가고 싶다는 조에게 대고모는 “혼자 힘으로 사는 사람은 없어”라고 말한다. 그리고선 특히 여자는 결혼을 잘 해야 한다고 덧붙이기까지 한다. 여자가 돈을 벌 수 없던 시대를 사는 그들에게 독신 여자로서 부자가 되어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꿈을 이루고 돈을 벌겠다는 야망을 가득 안고 있는 조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종종 자신이 쓴 소설을 출판사에 익명으로 투고하는 삶을 산다. 그러다 결국 베스를 잃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동생을 잃은 상실감과 그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이 답답한 조는 로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로리의 고백을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 “여성에겐 사랑만이 전부라는 말에 신물이 나요.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 여성에게도 감정만이 아닌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닌 야심과 재능이 있는데 여성에겐 언제나 사랑이라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는 것이 지긋지긋했던 조는 휘몰아치는 감정들로 인해 사랑받기를 원하게 된다. 결국 로리가 다시 돌아온다면 자기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지만 로리는 에이미와 약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뜻하지 않은 이별들에 ‘각성’한 조는 –베스의 죽음이 가장 컸겠지만 프리드리히와 로리가 또 다른 이유가 되는 것처럼 영화에서는 보이고 있다– 불현 듯 자신과 언니 그리고 동생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출판사에 보내지고 드디어 조의 이름 ‘조 마치’가 책의 마지막에 자리 잡게 된다.

여성으로서 온전한 자신만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자를 만나야만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조는 남성에게 자신을 맡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조의 야망과 생각은 어딘가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 중 하나인 4B운동과 닮아있는 듯한데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경제 체계에서 여성의 입지를 다져 여성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자는 점은 조의 생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조가 엄마와의 대화에서 여성과 사랑에 대해 역설하는 장면은 더없이 슬프게 다가온다.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는 느껴지지만 <작은 아씨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다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여성들에게 꿈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앞서 말한 슬픔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왔던 여성들은 –비단 그 시대 여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남성, 타인에 의해 받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해왔다. 하지만 조, 루이자 메이 올콧은 그러지 않았다. 여성의 예술이 인정받지 못 하고 여성은 남성에게서 독립되어 생활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서 루이자 메이 올콧은 자신만의 예술을 창작하고 책의 판권을 팔지 않는 해안까지 갖춰 제 꿈을 이뤘으며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이런 루이자에게 본인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지 자신의 옆에 있는 누군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익명으로 글을 쓰던 조는 혼란을 겪은 후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글에 ‘조 마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조가 사랑을 주었던 것은 글이지만 결국 그 사랑은 원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 사회와 맞섰던 조 자신에게 돌아왔다.

어른의 존재

▪ 오이

한 권의 책을 읽듯 유려하게 펼쳐지는 영화. <작은 아씨들>은 ‘조’(시얼샤 로넌)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두 시점을 오가는 변주– 를 통해 완벽한 플롯을 만들어냈다. 색감의 대비와 인물을 담는 구도, 덧대어지는 음악의 조화는 어릴 적 기억을 보다 환상적으로 재현해낸다.

영화의 순간들은 꿈만 같았다. 그건 이 영화가 취한 ‘환상적인’ 연출 방식이 한 몫 하지만, 결국 꿈이라는 공간 –즉 현실과는 다른 어떤 이상의 세계– 처럼 느껴졌던 건 ‘따뜻함’을 내보이는 방식 때문이다. 이는 영화 속 어른의 존재로 발휘되곤 하는데, 네 자매가 ‘각자의 것’(자신이 좋아하는 것 혹은 꿈꾸는 것)을 가지고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기도 하다. 정서적으로 마땅히 지원해주는 어른의 존재이다. 그의 존재는 특히 결혼이 아닌 작가의 꿈을 택한 ‘조’와 나누는 대화에서 톡톡히 드러나는데, ‘조’에게 표하는 그의 지지는 분명하고 열렬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조’가 스스로 선택할 공간을 절대 침범하지 않는 적정한 간격 내에서 이루어진다. 이 어른은 자신의 생각을 답으로 내세운 소위 ‘현실적인’ 조언을 하지 않으며, 꿈을 두고 무책임한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는다. ‘조’의 관찰자이면서 지지자인 그의 태도는 그 당시 여성이 살아가는 시대상과 집안의 형편을 생각했을 때 꽤나 이상적으로 다가온다.(그간 시대물에서 봐왔던 가난한 집의 모부의 모습, 즉 딸이 나이가 차면 재능이 있건 없건 적당한 남자에게 얼른 시집보내려는 다급함이 그에겐 없다)

조의 엄마, 즉 네 딸의 엄마로 등장하는 이 어른은 크리스마스에 자신보다 배가 고픈 이웃에게 음식을 가져다준다거나,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목도리를 풀러 건네줄 정도로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선한’ 인물이기도 하다. 가난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소외된 이웃에게 베푸는 그는 –사실 이젠 좀 피하고 싶은– 전형적인 따뜻한 ‘엄마’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쉽사리 ‘선’을 배척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보이며 그런 어른의 존재가 절실해지는 지금에선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가히 그의 존재가 현실세계에서 와 닿지 않아도 말이다. ‘돕는’ 어른, 귀를 연 어른, 애정만이 아닌 존중으로 지지해주는 어른. 끝내 사라지지 않는 분노에 자신의 좋은 면이 잠식되지 않게 노력하면서, 못 참고 울분을 터뜨리는 다음 세대에겐 자신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거라 말해주는 어른. 어쩌면 이상적인 ‘따뜻함’과 이 어른의 단단한 형태가 ‘조’를 더욱 ‘조’다울 수 있게 도왔으며, 결국 ‘조’에게 필요했던 어른의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외로움과 분노에 잠식되지 않게 눈길을 보내는 그런 어른의 존재로 말이다.   

에이미가 선택한 것

▪ 183

루이자 메이 올컷의 원작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독자들의 분노를 가장 많이 산 대목은 어디일까? 확실하건데 단연코 에이미가 조의 소설을 불태워버리는 장면일 것이다. 철없고 샘이 많은 에이미의 성격적인 단면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에피소드인 만큼 그 장면은 그레타 거윅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에서 또한 각색 없이 재연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럼에도 에이미가 별다른 유감없이 관객들로 하여금 인상적인 캐릭터로 기억될 만큼의 캐릭터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은 즉, 감독이 소설 속 기존 에이미 캐릭터에 새롭게 부여한 서사와 당위성이 영화 내에서 설득력 있게 발휘되었다는 의미다.

조와 에이미는 근본적으로 같은 욕망을 가진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 하지만 그 욕망을 어떻게 분출하고 나아가는 지에서부터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누군가는 그 지점을 ‘가지고 있는 재능의 여부’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것을 ‘현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라고 본다. 이를 테면, 조는 프리드리히로부터 자신의 글에 대해 처음으로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되나, 그 일로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지기는커녕 길길이 날뛰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장애물도 글에 대한 조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고, 결론적으로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 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반면 에이미는 어떤가. 어렸을 때에는 그림에 대한 야망(조의 그것과 비교하여도 손색없는)이 있었고, 대고모를 따라 유학길에 오르기도 하지만 결국 그림이 아닌 결혼시장에 뛰어들게 된다. 이 선택은 언뜻 반 페미니즘 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관객들은 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에이미가 선택한 것은 ‘결혼’의 탈을 쓴 ‘현실’이라는 것을.

에이미는 본인의 화실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 비꼬는 로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돈 벌 방법이 없어. 생계유지나 가족 부양도 힘들어. 돈도 없지만 만약 있더라도 결혼하는 순간 남편 소유가 돼. 아이를 낳아도 남편 소유지. 그러니까 속 편하게 앉아서 결혼이 경제적인 거래가 아니라고 하지 마.” 이 장면은, 이 대사는 ‘샘 많은 막내’라는 기존 에이미 캐릭터의 납작함에 입체적인 설득력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당시 부당한 현실에 굴복한 여성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음을 상기하며,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을 경제적인 선택으로 만든 사회 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메릴 스트립의 제안으로 촬영 당일 추가되었다고 알려진 이 장면은 놀랍게도 시종일관 여성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 덤덤한 어투로 이야기하는 극의 단단한 뿌리를 담당한다. 동시에, ‘화가 난다는 이유로 조의 소설을 불태웠던’ 에이미가 극중 가장 단단한 눈빛을 한 장면이기도 하다.

여자가 꿈을 이루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

땡선

여자의 사랑과 꿈은 왜 함께 갈 수 없을까. 극 중 조 마치(시얼샤 로넌)가 로리 로렌스(티모시 샬라메)의 고백을 거절하는 장면에서 조는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일과 결혼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난 결혼은 안 할 거 같아. 이대로의 내가 좋아.” 라는 말로 로리를 거절한다. 후에 뉴욕으로 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신이 쓴 글로 돈도 벌며 주체적인 삶을 살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로리를 추억하고 그와의 재회를 기대하며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 조의 모습은 어릴 적부터 조의 옆에서 꽤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주던 로리를 잃는다는 것이 조에게도 상당한 타격이었음을 보여준다.

둘 사이에 어떠한 성적 긴장감이나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둘의 관계를 사랑보다는 절친한 사이에 더욱 가깝다고 느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 둘의 사랑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가족들 사이에서 여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조에게 있어 로리는 물론 자매 이상의 존재였겠지만,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꿈을 존중해주는 남자인 로리는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조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여자에게는 사랑이 전부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시선에 돌을 던지듯 여자에게도 야망이 있고 재능이 있다고 소리치는 조일지라도 결국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로리를 거절했던 과거의 선택을 후회한다. 

여자들에게 사랑은 뭘까. 19세기의 그들이 보는 것처럼 여자의 존재를 나타내는 기준일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몰가치한 걸까. 이것은 비단 사랑 이외에 선택지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사랑을 외면한 채 애써야했던 19세기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사랑 받기 위해 애쓰고, 사랑 받지 못 했다는 이유로 내 존재를 의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자꾸만 더 많은 걸 포기하는 여자들이 많아지는 건 왜일까. 하나에 집중하기도 버거운 지금,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택한 것일 수도, 포기했다기보다 우선순위를 달리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항상 어떻게든 나에게 돌아왔고, 나를 성장시켰고,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에 모든 여자들이 각자가 원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좇아 그것을 원동력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은 필수적이고 어떻게든 사랑을 해야 한다는 희망적인 얘기가 아니다. 여자들의 생각을, 일을, 그들의 의사를 오롯이 존중해줄 수 있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말이다. 두려움과 불안함 없이 꿈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를, 마찬가지로 사랑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여러 개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 없이 모두 집는 것은 결코 욕심이 아님을 말해주고 싶다.